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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퇴임사]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며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공로연수를 들어가면서 청내 게시판에 남긴글 전문입니다

누구나 젊은시절엔 세월이 영원할거 같고 퇴직도 남의일같이만 느껴지는데....

지나고 보니 세월은 정말 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 버립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며...


참으로 짧고도 긴세월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40년간의 공무원 생활의 긴 여정을 뒤로하고 공식적인 공직생활은 이것으로 마감하고 이 자리를 떠나려 합니다


강산이 4번 바뀌는 세월이었으니 물리적으로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하였겠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청춘인데 고등학교 졸업자 신분의 솜털 뽀송뽀송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주름진 얼굴에 머리가 히끗한 이순(耳順)의 초로(初老)가 되어 무엇하나 뚜렷한 공적없이 떠나야 하다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많이 부족한 제가 나를 품어서 길러준 고향 예천에서 대과없이 공직생활을 마감할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동료공직자 여러분의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 하며 모든 분들의 성원을 마음속 깊이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며 13번이나 부서를 옮겨다녔는데 농정과와 농업유통과에 9년간 근무한것이 최고로 오래 머문곳이고 짧게는 유천면에서 겨우 6개월도 채 근무하지 못한곳도 있습니다. 현재 예천군청에 근무하는 공직자중 저와 한번이라도 같이 근무한 사람은 총인원의 4분의1 정도에 해당하는 159명이네요


그중에서는 인연이 많아 최고 4번까지 같이 근무한 사람이 2명이나 있으며, 3번이 8명 2번이 33명 1번이 116명입니다. 아마 이숫자에 못지않게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직원한분 한분에 대해 다 챙겨주지 못하고 선배공무원으로서 역할을 잘하지 못했음을 미안하게 생각 합니다


저는 그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기보다는 바른생각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제인생을 최대한 제주체적으로 제의지에 의해 따라 살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올바른 공직을 수행하는 밑거름이라 생각 했습니다

하루 두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고 술은 물론 한때 너무나 좋아하던 도박과 게임 그리고 종교까지도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물이라 생각되어 믿지않고 생활에서 절제를 큰덕목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데 큰힘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의미이며 한번 왔다가는 세상 무슨재미로 살아가느냐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저라고 본능을 이길순 없기에 달콤환 환상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지만 될수 있으면 공직에 있을때라도 제정신을 깨워두고 싶고 진짜세상을 살기위해 포기해야 한다면 참을만 하다고 생각하고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는 아름다운 길목이라 생각 합니다


해현경장(解弦更張) 이란 말이 있습니다.

거문고의 줄이 낡았으니 다시 바꾸어 매다란 뜻이죠


예천은 현재, 아주 중요한 역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신도청시대의 개막으로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예천이 우뚝설수 있도록 안으로 자양분을 만들어내야 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수직상승의 도약을 일궈내고 발전과 성장을 견인해야할 주역은 다름아닌, 공직자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이번 6.13 지방선거 결과로 군민은 김학동 군수님을 선택 하였습니다.

사람은 그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면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제 거문고 줄을 바꿔 뀌웠으니 다시 옛영광을 위하여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도록 연주하는 것은 군민과 공무원들이 함께 앞장서서 이끌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그동안 농업직 공무원으로 근무해 오면서 농업이란 생명을 지켜주는 산업이며, 농촌은 우리 삶의 뿌리로 이것을 지키는 일에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산업화의 진전과 경제구조의 고도화에 따라 농업종사자가 급격히 이탈하여 농업이 다른산업에 비해 규모가 크게 위축되고 있는 모습을 평생동안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공무원을 시작한 1978년 농업인구는 전체인구의 30% 이던 것이 현재는 5% 정도로 줄었고 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 보다 높았던 농업 비중이 이제는 3%미만에 불과하나, 제조업은 3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전체산업에서 농업비중은 아주 미미한 존재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전체로 보면 잘된일이지만 가끔은 식량(쌀)이 남아돈다 하여 농업, 농촌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보도나 말들을 들을 때 씁쓸함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아마 이제 몇십년후면 농촌이 소멸될것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속에 지금까지 우리가 피땀흘려 이룬 경제성장도 농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0년전인 1998년 최저시급이 1525원으로 현재 7530원에 비하면 5배나 올랐지만 쌀값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고 애완용개 한 마리 의수족하고 수술 하는데 500만원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농업인들은 1년에 겨우 천여만원의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절반에 육박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일반 사업자들은 보조금이 하나도 나가지 않는데 농업인에게만 보조금이 너무 많이 나간다느니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농업이 보조금이 많아 그렇게 좋은직업이고 돈되는 일이라면 어려운 자영업자들이 모두 농업으로 모여들텐데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이 나간다는 보조금도 OECD국가 평균에 비하면 겨우 3분의1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 각나라마다 농업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길까요? 선진국도 농업이 크게 돈안된다는것은 잘알고 있지만 농업이 망하면 결국은 식량부족으로 국가존립이 위태로워 지니까 보조금으로 농업만은 살리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평생을 한 직장 한 분야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 농업에 대한 오해를 하는 사람이 많기에 떠나기 전 넉두리로 이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듯이

공무원 생활에도 역시 정답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몇가지 말씀드리면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켬퓨터를 사랑하고 워드, 엑셀, 파포, 포샵, 그리고 동영상 편집프로그램 하나정도만 기본적으로 해두면 평생 써먹을수 있고 업무시간 단축과 일잘한다는 소리들으며 조금더 편하게 벌어 먹을수 있습니다


책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수 있는 유연함이 생깁니다. 저는 큰 아이가 7살 때부터 한달에 한번은 꼭 서점에 들러서 책을 한권씩사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퇴직하면 손자가 이제 7살 5살이 되었으니 이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달에 한권의 책을 읽을수 있도록 같이 서점에 꼭 들리려고 합니다

보통 공직자 뿐만아니라 직장생활을 하게되면 술을 많이 먹게되고 이또한 허가된 마약이라 스트레스 해소와 또다른 한세상을 살기에는 좋은것이지만 건강을 해치고 인성이 변하여 정신을 황폐하게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은 내가 살아 보지않은 여러세상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매너리즘과 포플리즘을 멀리해야 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노력하며 초심을 잃지말고 자신 보다는 동료와 단체를 생각하고 내가 공직으로 인해 배운 것이나 또다른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이또한 나의것 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음 업무 보는이에게 전달이 잘될수 있도록 인수인계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항상 사람들은 긍적적이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일반 생활에서나 그렇지 사업을 하고 공직자로서 자세에서는 맞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주식투자 회사에서 큰사건을 낸사람들은 모두가 긍정적 낙관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도 볼수 있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된일은 모두 자기가 한것처럼 남의 성과를 훔쳐(?)오고 모든 사업들이 자기가 하면 쉽게 했을텐데 남이 하여 잘못된것처럼 떠들고 다니며 잘안되면 나중에 마무리는 동료가 해야하는 이런 일들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듣는것은 사실이 아니고 견해일 뿐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관점일 뿐입니다.

사람은 권한이 주어졌을 때 자기의 성품이 잘드러난다고 링컨은 말하였습니다.


저도 많이 무능력 하지만 어쩌다 보니 사무관까지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저에게 사무관 자리를 주신 이현준 군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장(혹은 읍면장)이 된다고 하는 것은 최하단위 지방직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꽃이며 어쩌면 이 자리가 최후의 목표가 될수도 있습니다.


40년이란 기나긴 공직생활을 해오다 보니 별의별 상급자를 다만나게 되었고 모두가 좋은분들 이셨고 많은부분들이 저에게 큰도움이 되었습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신날때는 내가 한 업무의 성과를 남이 알아줄 때 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지 못할때는 한계를 느끼며 벽에부딪치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


다른사람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는 매우다른 인물일수도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꼰대짓은 절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몇 년연속 청렴도 평가 전국 최우수 군으로서 저는 공무원으로 큰 자부심을 가졌고 내가 생각하는 그런세상이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타시군에는 아직도 관습적으로 상급자가 되어 출장간다 휴가간다고 아래직원들이 조금씩 거둬 챙겨주고 받는 경우도 아주 가끔은 있다고 들었습니다. 더많은 봉급을 받는 위엣사람이 이런다면 미투보다도 오히려 더 부끄러운 일이 될것입니다.


저는 사무관이 된이후 만 3년 6개월을 곤충연구소장으로만 재직하고 떠납니다.

저는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근무한 어떤자리에서도 일요일 공휴일을 단한번이라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공휴일날만이라도(축제때 제외) 쉴수 있어서 나를 한번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가정을 버리고(?) 오직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세월들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직장이 가정보다 더소중한 존재였는지 같이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소장만 빼고 직원들은 공휴일에 출근합니다)


여기 곤충연구소에서 근무하게되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 강한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유능제강(柔能制剛) 대현약우(大賢若愚)라는 단어는 제가 남앞에서 나를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제 책임과 의무를 벗어나 앞으로 밟아보지 못한 또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또다른 세상에서 새로운일을 시작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 오릅니다.

저에게는 슬픈 이별의 날이 아닌 행복한 졸업식과 새로운 출발의날 입니다.


뭐 하나 잘한거야 없지만 국가에서 연금까지 받게되다니 40년동안 참으면서 살아온 세월들이 가족들에게도 자랑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퇴직을 하게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데 저는 반대로 자식들이 있는곳으로 본의 아니게 역귀향을 하게되었습니다. 이제 7월이면 아는사람 하나없는 삭막한 곳으로 갈려니 마음은 차마 예천을 떠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역시 떠나가는 선배 공무원들의 뒷모습을 많이 보았고 퇴임인사의 글도 많이 읽었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에게 제 뒷모습이 추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참~ 저는 복이많아 아이가 빨리 결혼하여 손자만 둘을 얻었습니다.

아이스크림 안사준다고 아무곳에서나 길바닥에 드러누워 땡깡 부리는 귀여운 손주로부터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소소한 행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로 인해 불편하셨다거나 서운했던 부분이 있으셨다면

넓은 마음으로 해량(海諒)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미래”는 반드시 옵니다

제가 미리 가있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2018. 6. 29 예천 곤충연구소장